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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고마운 사람

히블내미2 2024. 8. 16. 02:34

히블내미에게는 두분의 누님과 한명의 동생이 있습니다

용아~~언제 한번 안나오나~~보고푸다~~엉엉!!

히블내미 목소리만 들으면 우리 장남 하면서 눈물을 흘리던 큰누님

옥순씨가 한국방문때 찾아뵈면 넘 잘챙겨주셨다는 울 큰누님

어머님보다 1년먼저 코로나를 이기지 못하고 천국을 가셨습니다

어머님께서 22년 뉴이어 이브에 94세로 천국가셔서 큰딸을 보고 

니가~니가왜~거기서나와~~~~아!! 하시면서 무지 놀라셨을것

사실 어머님 생전에 아시면 넘 힘들어 하실까봐 감추었거든요

 

작은누님은 미국방부 공무원으로서 오랜세월 한국 평택에서

파견근무를 하시다가 코로나 기간동안 수없이 많은 업무를 성실히 수행하셔서

피츠버그 미 보훈처장상을 마지막으로 은퇴하시고 미국 플로리다에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그리고 자랑스런 내동생 고등학교때 전국웅변대회를 나가서

최우수상을받고 칭구들이 행가래를 치던중 산산조각난 트로피를 

껴안고 도둑기차를 타고 대구역에 내려 월담후 택시를 대절해서

시골집에 도착 한밤중 택시비를 계산해주던 황당했던 지난추억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선발이 되었으나

시골형편상 하숙비와 생활비를 계산해보고 포기한 동생

그러면서 빨리 해병대를 지원 제대하고 미국행을 결심

히블내미가 비행기표값 마련한다고 집에 키우던 개 팔고

빌리고 우예우예 미국 보냈는데 숙소에 도착했다면서 

걸려온 국제전화 히~~~야 !! 7달러나 남았떠~~!!

한인들 여러명이서 같은 숙소를 사용하면서

밤마다 고수톱 때리다가 이게 내 인생이 아니다 깨닫고

탈출 온갖일로 경험을 쌓으면서 벌시는 사업마다 대박

은행에서 믿고 맏기는 투자 그래서 발전한 동생

 

히블내미가 25년 미국생활을 하면서

수없이 많은 한인들을 보면서 살아왔지만 

동생만큼 부자는 우리도시 한인중에 아직 못봤습니다

그리고 우리집에서 가장 걱정스러운 히블내미

어린시절 시골집 안방에는 누나둘과 동생의 상장으로

벽에 도배가 되어있을때 가장 중간에 히블내미 

1년 개근상하나 학교 다닐때는 우째그리 상이 귀하던지요

거다가 히블내미는 얼숙해서 칭구들이 깐보고 놀리기도 하였고

때로는 맞을때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누님들이 그넘들을 찾아 

감히 우리 장남을 하면서 두번다시 그러지 못하게 혼을내고요

가정을 가지고 부터는 옥순씨가 나의 보디가드로서

배경으로서 어느 누구도 히블내미를 얕보는 사람이 없게끔

매일같이 폐하 대접을 받으면서 오늘도 행복합니다

 히블내미가 군대 생활을 할때 아버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어머님께서는 미국행 비행기를 타시고 졸지에 고아가된 히블내미

시골집은 폐가처럼 변해가고 히블내미가 해양경찰대를 제대 한뒤

동생이 해병대 가고 그리고 제대하고 미국뱅기 탔고요

홀로남은 히블내미 농사로서 Lee 가문을 한번 일으켜 볼려고 나홀로 삽질하고

낫질하고 쟁기질하고 탈곡기를 발로 발바가며 시롱~ 매롱~ 와롱~ 하면서

별짓을 다했지만 자연앞에서 속수무책 농기구를 금호강에 

버리고 시골을 탈출하면서 드는생각 하나 있었어요

히블내미가 학교 다닐때는 초등학교 1년 개근상 밖에 못받았지만

해양경찰대 근무를 할때 전국 수많은 대원들 중에

가장 높은사람의 표창을 내가 받았는데 그런 정신으로 

사회 생활을 하면 나도 촌님 생활보다는 갼켔지 하는생각 들었어요

서울로 입성 나름 열심히 일하면서 공부를 하였고 큰 건설회사에

근무를 하면서 중동 파견근무도 성실히 수행 하다보니

중동 사업 본부장의 표창과 금일봉이 주어졌습니다

히블내미의 20대초반시절은 이렇게 흘러갔지만 가정을 가지면서

떠돌이는 안되기에 새로운직장이 필요해서 은행에 취업했습니다

하지만 쫀쫀한 월급에 만족하지 못하고 

직접 현장에서 고객들과 함께하는프리랜서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서울 4대문일대 그리고 청계천일대 새로운 도매상 건물이 생겨나면 퇴근을 

잊은채 밤새 상인들과 함께 생활을 했습니다

움직이는 은행으로서 금융업무를 가게에서 직접처리해 주다보니

도매상 상인들 거의가 히블내미한테 통장을 개설해 주었습니다

고객 모두의 적금과 정기예금 수당으로 일반 직원들 월급의 두배

하지만 몽땅 내 주머니로 들어가는게 아니라 수당의 절반은 

고객들의 생일이나 기념일 야유회에 투자를 해줬습니다

대한민국 전 금융기관 직원중 최다 고객보유자 

최고 예금 보유자로서 아주 높은사람 표창을 받았습니다

촌님이었던 히블내미에게도 무지갯빛 인생이 펼쳐지는줄 알았습니다

아들아~미국온나~동생아~미국온나~히야~미국온나~!!

싫다 싫어라 ~미국 난 안간다 아침에 포장마차에서

먹는 오뎅라면 한그릇 만족하다 난 여가조타~~!!

매일같이 새벽 6시만 되면 마주하는 상인들의 얼굴에 근심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저 멀리서 IMF 란 어두운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하는것을 저 역시 느낄때쯤

상인들의 허리와 저의 허리도 꺽기기 시작했습니다

상인들의 아우성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히블내미에게 매달리는 손길이 점점 많아져서  저의

마음도 두려워지고 모질지 못한 성격의 히블내미가 코싸인으로 

상인들을 살려볼려고 했는데 같이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나쁜 사람은 한사람을 힘들게 하지만 사람좋다보면 

전 가족을 힘들게 한다는 생각에 콱~뒈져 버리고 싶었습니다

방송국에서 요가 프로그램 강사를 하고있던 울 옥순씨

여보~힘내 !!당신은 또 일어설수있어!! 우리 미쿡가자! 까짖년으꺼~~!!

모든 가족들이 걱정하고 염려하던 히블내미

직장인으로 평생을 살고 싶어했던 히블내미

요가 스타강사로 날리던 옥순씨는 레스토랑 웨이츄레스

히블내미는 돈을 세는데 일인자가 졸지에 요리연장들고 난리고요

이 모든것이 팔자에 없는것이라 생각치 않고

팔자에 있는것이라 생각하니 견딜수가 있었고 10여년후 주인이되고

비지니스를 하면서 힘들어 손을 놓고 싶을때도 있었지만

이 시대 최고의 깡다구를 가진 옥순씨의 깡단으로 이겨냈습니다

우리동네 레스토랑중 고객 선호도 1위

보건소 무조건 100점 4대가 함께오는 31년차 레스토랑 

수천장의 고객사진 히블내미와 옥순씨의 역사입니다

우린 지금이 젤행복합니다 작년도 싫어라~입니다

초가집 쪽 마루에 우리 사남매 모여앉아

보리밥에 콩나물 무우소쿰 무우생채

고추장에 된장넣고 썩썩비비서 큰 양푼에 둘러앉아

맛나게 먹다보면 보리밥 알갱이 따로놀지만

나물넣고 된장넣어 한번더 비비지요

야야~뛰지마라~배 꺼질라~~

먹을것이 귀해 쓰고단것 가리지 않고 먹던시절

몽땅 숟가락 들고앉아 서로먼저 먹고싶지만

눈치만 살피던 그 시절 그립고요

마음착한 누님들은 느가먼저무라  물러나고

날센돌이 동생 열이가 얼른한술 뜨지요

들에서 돌아오신 부모님 등짐 벗으시고

우물물 퍼올려 서로 흐른땀 씻으시면

큰누님 지은저녁 온가족이 먹지요

착하고 부지런한 살림밑천 우리 누님

혼례날 우리누님 많이 우시더니

어머님은 누님 손잡고 함께 우시고요

시댁에 깻잎농사 엄청 많이지어

누님 시집올날 기다렸지만 착한 자형

누님 힘들까 깻잎농사 갈아 엎었지요

그러던 우리누님 할머니 되셨고

개구쟁이 막내도 장가들었고 

손주가 수두룩 어느새 추억을 먹고 사는데

코로나가 울 큰누님 천국으로 모셨네요

흐르는 세월 잠시 잊었더니 히블내미 머리는

희어지고 주름은 깊어지고 어느새 손주가 여럿이라

강산이 두번반 바뀌도록 히블내미 기다리던 울 큰누님

결국 못보고 천국가신 울 누님 지나간 날들이 

너무도 아쉽고 미안하여 무심한 세월아 서둘지 말라

사정해도 지 갈길 바쁘다며 뒤도 안돌아보네요

그때 그시절 너무나 그리워서 

꽁보리밥 콩나물에 고추장을 비벼봐도

온가족이 함께먹던 맛을 찾을수가 없고요

살림살이 어려워서 못먹고 못입던 그시절이

무애그리 그리운지 평상에 둘러앉아 부모님 모시고 

먹던 그 맛을 잊을수가 없네여~

한가한 주말오전 옥순씨는 수영가고 배달오는 

레스토랑 재료를 받으려고 기다리면서 

지나간 세월들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군바리타고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옥순씨

여보~제천 촌년이 당신만나 출세했떠~

미국에도 살아보고 군바리도 타보고 ㅎㅎ

히블내미를 우쭐하게 만들어주는 옥순씨 

고마운 사람입니다